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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기정 생애

손기정 생애우승의 그날

험난한 베를린으로의 여정-
“어째서 마라톤에는 조센징(조선인)이 두 명이나 끼어 있소?”

베를린 올림픽 육상 대표 팀에 들어간 손기정, 남승룡 선수는 안심할 수 없었다. 일본 측에서는 올림픽 대표단에 조선인이 있는 것을 매우 못마땅해 했는데, 마라톤에는 두 명이나 들어가 있어 어떻게든 둘 중에 한 명을 떨어뜨리려 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 둘은 운이 좋은 편이었다. 올림픽에 출전한 일본 대표단의 조선인은 7명이었는데, “세계 신기록을 여러 차례 세우고 있던 역도의 남수일(南壽逸), 그 때 막강함을 자랑하고 있던 레슬링의 황병관(黃炳寬) 등은 아예 뽑지 않았다.” 고 손기정 선수는 훗날 돌이켰다.
더 많은 조선인들이 대표 팀에 들어갈 수 있었음에도 일본체육관계자들이 조선 선수들이 많이 뽑히지 않도록 여러 가지로 부당한 조치를 취했던 것이다.

  • 1936년 6월 4일 서울역 출발 당시 사진_조선일보

  • 우여곡절 끝에 1936년 6월 3일 아침, 조선체육회장 윤치호(尹致昊), 올림픽 선수단 총무 이상백, 총독부학무국의 정상희, 양정고보교장 안종원, 교감 서봉훈(徐鳳勳) 등이 모여 손기정, 남승룡 두 선수의 격려회를 열었다.
    “일본 대표이기 이전에 조선 청년으로서의 기개를 온 천하에 알려주기 바란다.”는 격려사에“반드시 훌륭히 싸우고 돌아오겠습니다. 저희들은 오늘 베풀어주신 여러분의 따듯한 격려에 보답하고 해외에 살고 있는 많은 동포들의 뜨거운 응원과 기대에 부응하도록 늘 자중(自重)의 정신을 잊지 않고 힘껏 싸우겠습니다.” 라고 답해 듣는 망국의 한을 담은 사람들의 가슴을 울렸다.
    4일 오후 3시 반 서울역에는 수업을 단축하고 모인 양정고보 전교생과 교직원들, 조선 육상관계자, 일반 승객으로 인해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환호소리가 서울역을 뒤흔드는 가운데 경의선에 몸을 실은 마라톤 선수들은 대륙 횡단의 장도에 올랐다.
  • 시베리아횡단철도 티켓_앞면

  • 시베리아횡단철도 티켓_뒷면

손기정, 남승룡 선수를 실은 경의선 열차는 북으로 북으로 손기정 선수의 고향인 신의주를 향해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내달렸다. 신의주에 열차가 멈춰서자 이 들을 환영하는 수많은 인파의 함성이 울려퍼졌다. “손기정 군 만세! 남승룡 군 만세!! 올림픽 마라톤 선수 만세!” 이들을 보려고 플랫폼에 모여든 사람들을 향해 두 선수는 목 메인 작별 인사를 건넸고 발차를 알리는 기적 소리가 울리자 또 다시 환호 소리가 밤하늘을 가득 메웠다.
정차 시간이 긴 안동에서 손기정 선수는 가족과 만나 인사를 나눴고 다시 열차는 당시 일본이 세운 괴뢰국인 만주국 으뜸의 상공도시인 봉천(奉天), 그리고 수도인 신경(新京) 하얼빈을 거쳐 8일 소련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만주리(滿洲里)에 도착하였다. 여기서 일행은 시베리아 철도로 갈아타서 모스크바까지 8일 동안 달려야 했다. 14일 밤 모스크바에 도착하였고, 대표단은 15일 밤 다시 열차에 몸을 싣고 모스크바를 출발, 폴란드의 바르샤바를 거쳐 17일 아침 베를린의 프리드리히 역에 도착했다.
프리드리히 역에는 독일주재 일본대사관 직원들과 많은 일본인들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박수로 손기정 일행을 맞이한 것까지는 좋았으나 대사관 직원의 다음 말에 손기정과 남승룡 선수는 입술을 깨물었다.
“어째서 마라톤에는 조센징(조선인)이 두 명이나 끼어 있소?” 두 선수는 분노에 치를 떨며 일본인의 오만과 편견에 대해 저항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마라톤에서 우승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1936년 6월 17일 시베리아횡단열차를 타고 베를린역에 도착한 모습

무모했던 현지에서의 선발전

현지에서 훈련을 하며 올림픽을 기다리던 일본대표팀은 어떻게 해서든 손기정 선수와 남승룡 선수 중 한 명을 떨어뜨리기 위해 대회를 18일 앞두고 30km의 선발전을 또 한번 치른다. 선수들의 컨디션 조절을 해야 할 시기에 이 같은 무모한 마라톤 레이스를 강행한 결과 결국 몸이 좋지 않았던 일본인 선수(스즈키)가 도중 포기, 탈락하게 되고 반칙으로 샛길로 달리기까지 한 시오아꾸가 3위를 하게 되어 손기정 선수와 남승룡 선수의 올림픽 출전을 공고히 할 수 있게 되었다. 사실 이미 올림픽 출전 엔트리는 7월 22일에 마감되었었다.
멤버는 손기정 선수와 남승룡 선수, 그리고 시오아꾸로 결정 되어있었지만. 그럼에도 굳이 현지에서 선발전을 강행한 것은 어떻게든 조선인 선수 대신 일본인 선수를 출전시키고자 명분을 만들기 위함이었다. 만약 손기정 선수나 남승룡 선수 둘 중의 한 선수가 최하위에 머문다면 독일과의 친분을 이용해 스즈키로 교체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또 한 번의 위기를 정정당당하게 실력으로 넘긴 두 선수의 선발전에 대한 내용은 당시 일본의 어느 신문에도 실리지 않았다. 4명의 후보 선수 가운데 3명의 정식 대표가 가려지는 중요한 경기였음에도 단 한 줄의 기사로도 나가지 않았던 것을 보면 일본인 입장에서도 이 선발전이 얼마나 떳떳하지 못했던가를 짐작케 만든다.

나는 KOREA에서 온 손기정이오

  • 금메달리스트 사인북

  • 성격이 활달했던 손기정 선수는 선수촌 내에 머무는 동안에도 외국인들과 활발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등 훈련에 매진했다. 이 와중에 많은 싸인 요청을 받았는데, 그는 서슴없이 한글로 「손긔졍」이라고 쓴 자신의 이름에 곁들어 나라 이름을 JAPAN이 아닌 KOREA라고 적었다. 때로는 사인 옆에 한반도를 그려 넣기도 했다. “1932년 LA올림픽에 일본대표 선수로 출전했던 김은배 선배가 현지에서 사인 요청을 받으면 한글로 써주었다는 얘기를 듣고 나도 그대로 따랐다. 우리나라 사람이 우리 글로 사인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
    함께 베를린 올림픽에 참가했던 이성구는 “손기정은 민족정신이 대단히 강했던 선수다. 일본인이 싸인을 해달라고 요청하면서 사인 옆에 그들의 명산인 후지산을 그려달라고 하면 후지산 대신 금강산을 그려주곤 했다. 「당신 그러다가 일본으로 송환되서 올림픽에 나가지도 못하게 돼」라고 겁을 주면 그는 「나를 올림픽에 안 내보내면 자기들만 손해지」라고 끄떡하지 않았던 기억이 생생하다.” 고 이야기 했다.
    손기정 선수는 선수촌 안팎에서 외국인이 어디에서 왔냐고 물으면 꼭 “KOREA에서 왔습니다.”라고 답했다. 베를린 올림픽에서 마라톤에서 우승한 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들이 싸인한 우승자 사인북에도 「손긔졍」이라고 한글로 또렷이 적었다.

    그의 이러한 행동은 일본선수단 내부에서도 일단 논의는 됐었으나 문제를 더 확대시키지 않기로 방침을 세워 덮어두었다고 한다. 한글을 잘 모르는 일본인 선수나 임원이 “어째서 그렇게 어려운 글자로 사인을 하느냐.”고 물어보면 손기정은 “한자로 손기정(孫基楨)이라고 쓰면 획이 많아 시간이 걸리지만 우리 글인 한글로 손기정이라고 쓰면 간단하기 때문이다.”라고 대답해 그들의 입을 막아버렸다.
    일제의 서슬이 퍼렇던 시절, 일본인들의 눈치를 살피지 않고 한글로 자기이름을 적고 나라이름을 KOREA라고 표기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우승 후 외국 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도 자신이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당당히 밝혔다. 리처드 만델은 그의 저서 「나치올림픽」에서 손기정 선수가 우승을 차지하고 기지회견 했을 때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손은 사실 한국인이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열렬한 민족독립주의자였다. 그의 조국은 1910년 일본에 합병 당했으며 그가 국제적으로 이기는 방법이란 그 가슴에 증오의 상징인 일장기를 달고 뛰는 것이었다. 그는 베를린에 있는 동안 공식적인 사인을 요구받으면 언제나 한국 이름을 썼으며 그 옆에 한반도 지도를 잊지 않고 그려 넣었다. 보통 질문을 받을 때 먼저 “어디에서 왔습니까?”라는 말부터 나오면 그때마다 손은 “한국에서 왔습니다.”라고 대답했다……중대한 사실을 적어둔다면 그 마라톤 레이스의 시상식 때 손기정과 남승룡은 기자들에게 자신들은 일본인이 아니라 한국인임을 이해시키려 했다는 점이다……’
  • 데이비드 발레친스키 더 올림픽 북

  • “손기정은 단호했다. 그는 누구에게나 자신이 일본인이 아니고
    한국인이라고 밝혔다. 그는 누구에게나
    ‘Me Korean……not Japanese’라고 말했다.”

    데이비드 월친스키도 그가 지은「더 올림픽 북」에
    ‘조국의 독립을 걸고 손기정은 달렸다. 그의 적은 함께 달리고 있는 러너들이 아니라 점령국 일본 뿐이었다……경기 후 기자단의 인터뷰를 받은 손기정은 지금이 절호의 기회라 여긴 듯 조국의 어려운 처지를 세계에 호소했다. 그러나 기자들은 거의 모두 흥미를 나타내지 않았고 이야기가 경기 자체로 옮겨갔을 때는 안도의 표정을 나타냈다’
    버드 그린스팬이 쓴 「올림픽 역사의 100가지 위대한 순간」에 담겨진 손기정의 모습은 다음과 같다. ‘경기 초반 1932년 로스 엔젤레스 올림픽의 우승자인 아르헨티나의 자바라가 선두를 달렸고 그의 뒤를 쫓는 선수들 가운데 일본의 손기정이 끼어 있었다. 손기정은 그의 나라가 일본에게 합병당한 2년 뒤에 한국에서 한국인 부모사이에 태어났다. 그가 베를린 올림픽에 출전하는 길이란 일본 선수단에 끼는 방법밖에 없었다. 손기정은 일본 깃발 아래 출전하고 일장기를 가슴에 달고 뛰는 것을 불행으로 여겼다’

    미국의 전설적인 마라토너이며 손기정 선수의 친구가 된 존 켈리는 “손기정은 단호했다. 그는 누구에게나 자신이 일본인이 아니고 한국인이라고 밝혔다. 
    그는 누구에게나 ‘Me Korean……not Japanese’라고 말했다.”

8월 9일, 그 날의 42.195km

8월 9일 오후 3시, 대망의 순간이 왔다. 출발을 앞두고 손기정을 포함해 세계 각국에서 모인 56명의 건각(健脚)들이 운동장 곳곳에 흩어져 있다 호명된 차례에 따라 출발선에 모여 들었다. 손기정 선수로선 이렇게 다양한 인종들이 모인 대규모의 국제대회는 생소했다. 4년 전 양정 고보에 입학했던 가을, 일본에서 개최된 일본-핀란드 간의 대항전 외 첫 국제대회나 마찬가지였던 셈이다. 56명의 선수들은 다소 질서 없이 크게 세 줄로 늘어서 출발을 알리는 총성을 기다리며 레이스에 최선을 다하겠다는 각오를 다짐했다. 메인스타디움을 거의 꽉 메운 8, 9만의 관중들 역시 출발 총성을 기다리며 숨을 죽였다.
손기정 선수와 남승룡 선수를 응원하기 위해 농구 선수 장이진은 경기가 끝나자마자 축구선수 김용식과 함께 메인스타디움의 관중석으로 달려 나왔다. 선수들 속에 섞여 있던 손기정 선수와 김용식 선수의 눈이 서로 마주쳤다. 김용식 선수가 손을 흔들어 보이자 손기정 선수도 희미한 웃음으로 답했다. 그는 평소처럼 컨디션을 확인하기 위해 물구나무를 해보았다. 몸이 가볍게 거꾸로 되었으며 흔들림이 없었다.

베를린올림픽 출발

베를린 올림픽의 42.195km 코스는 편도 코스가 아닌 반환점이 있는 왕복 코스였다. 반환점을 돌아서 뛰어왔던 길을 되돌아가면 메인스타디움에 도착하게 된다. 따라서 반환점에 도착하기 전의 내리막길은 반환점을 돈 후에는 오르막길로 변한다. 이번 코스의 또 다른 특징은 직선주로와 곡선주로에 있다. 메인스타디움을 출발해 하벨호반을 끼고 도는 운치 있는 곡선주로 14km를 빠져 나온 후 철길 옆에 있는 자동차 전용도로인 아스팔트 직선주로를 7km 정도 달리면 반환점에 도달할 수 있다. 다시 7km의 직선주로를 지나 하벨호반의 그류네발트 숲속으로 들어간 후 14km를 더 달리면 결승테이프가 기다리는 메인스타디움으로 들어가게 된다. 다행히도 뜨거운 여름날 하벨호반의 숲길은 직선주로에 비해 훨씬 시원하다. 하지만, 오르막과 내리막의 곡선주로 곳곳에는 여러 난관이 숨어 있고, 직선 주로는 단조로운 아스팔트길에 햇빛을 고스란히 받아야 하는 단점도 있다.
(왼쪽 이미지) 코스를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4km지점, 내리막길 6km지점, 평탄한 길 8km 지점, 내리막길 반환점 전후, 자동차 전용도로 34km 지점, 평탄한길 34km(출발 8km) 지점, 오르막길 37km(출발 5km)지점, 마지막 오르막길. (오른쪽 이미지) 베를린올림픽마라톤코스 지도
손기정 선수의 전략은 4km 지점의 내리막길에서 스피드를 내지 말고 6km 지점부터 시작되는 오르막길에서도 힘을 아끼자는 것이었다. 여름날 치르는 경기는 초반에 에너지는 최대한 아껴두는 것이 최상의 작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코스를 답사했을 때도 초반에 결코 서두르지 않는 것이 최선의 작전임을 확인했다. 답사 훈련에서도 34km나 38km 지점에서의 오르막 훈련이 주를 이루었다. 오르막의 난이도를 익혀두기 위해서였다. 훈련 시간도 오르막을 오를 시간에 맞춰 실시했다. 내리막에서도 서두르지 않기 위한 훈련을 거듭했다. 손기정과 남승룡 선수가 초반 레이스에 얼마나 신중을 기했는지는 시합 당일의 결과에서도 나타난다. 운동장을 빠져나간 초반 4km 지점의 구간 순위를 살펴보면 1위 자바라, 2위 포르투갈의 디아즈, 미국의 리랜드와 브라운, 벨기에의 에스켄스 등이었다. 그에 비해 최종 결과는 1위 손기정, 2위 하퍼, 3위 남승룡, 4위 스웨덴의 드미라, 5위 핀란드의 무이노엔, 6위 콜멘으로 결승선 통과 기록은 전혀 달랐다.

오후 3시(한국시간 밤 11시) 3분, 30도의 무더운 날씨에 태양은 작열하고 있을때 “탕!“, 출발 총성이 울렸다. 관중석의 들썩임과 동시에 56명의 선수들은 한 덩어리가 되어 스타트 라인을 떠났다. 선수들로 이루어진 덩어리가 한 바퀴 반을 돌아 운동장을 빠져나가기 시작할 무렵에는 긴 줄로 변해 있었다. 다들 단거리 선수인양 엄청난 속도였다. 하얀색 정구 모자를 눌러쓴 자바라의 모습은 아무것도 쓰지 않은 다른 선수들에 비해 쉽게 눈에 띄었다. 마치 하얀 정구모자 하나가 야구공처럼 날아가는 것 같았다. 다른 선수들의 터무니없는 속도에 당황했던 손기정 선수는 2.3km의 페르스트라야 철교 아래를 뛰면서 마음을 가다듬었다. ‘내 기록을 믿자. 어차피 마라톤은 혼자 뛰는 거니까 남들에게 동요되지 말자! 페이스를 잃지 말고 달리자!’ 대장정의 두려운 출발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3km 지점에 다다르자 하벨호반의 숲길로 들어섰다. 앞서나간 자바라는 4km 지점을 13분 4초 2로 통과하면서 여전히 선두 그룹의 지휘관 역할을 담당했다. 대단한 기록이었다. 선두 그룹에는 포르투칼의 디아즈(13분 34초), 미국의 리랜드와 브라운, 벨기에의 에스켄스, 영국의 하퍼 등이 있었다. 파보 누르미 선수의 후예들인 핀란드인 3인방은 흩어지지도 않은 채 선두 그룹에서 페이스 조절을 번갈아 맡아가며 스피드를 유지했다. 이들은 다른 선수들이 자신들의 앞을 제치지 못하도록 견제하기도 했다. 5km 지점에 다다르자 헉헉거리며 기권하는 선수들이 나타났다.
  • 1936년 11회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대회 당시 반환점을 도는 손기정 선수와 어니스트 하퍼

  • 10km 지점에서도 선두는 여전히 하얀 정구(테니스) 모자의 자바라였다. 손기정 선수는 10km 지점에서 선두 그룹에 있던 영국의 하퍼 선수를 만났다. 하퍼는 자바라가 오버페이스로 곧 무너질거라 예상하며 1위 아니면 2위를 확신한 채 자신의 페이스에 충실을 기하고 있었다. 그 때, 손기정 선수가 뒤에서 무서운 기세로 달려오더니 그를 앞지르려고 했다. 그러자 하퍼는 천천히 달리라는 손짓을 보냈다. 그의 손짓에는 이제 곧 자바라가 무너질 테니 우리가 1, 2위다, 페이스 조절을 해서 같이 뛰자는 뜻이 포함되어 있었다. 손기정 선수도 이제까지의 기세를 누그러뜨리고 그의 손짓에 긍정적으로 응했다. 이후 두 선수는 한동안 러닝메이트로 함께 달리게 된다.

    1시간 11분 29초라는 당시로선 놀라운 기록으로 자바라가 반환점을 통과했다. 자바라의 엄청난 기록 단축을 기대하며 세계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반환점을 향해 달리던 손기정 선수는 방금 반환점을 돌아온 자바라의 얼굴에서 많이 지친 기색을 엿보았다. 그 순간 그는 자바라를 따라잡을 수 있음을 확신했다. 손기정 선수와 하퍼는 전혀 지친 기색도 없이 2위와 3위로 거의 같이 반환점을 돌았다. 이어서 미국의 브라운 남아공화국의 콜맨, 스웨덴의 에녹슨이 순서대로 반환점을 돌았다. 남승룡 선수도 어느새 많은 선수들을 따돌리고, 순위는 12위였다.

    손기정 선수는 하퍼와 같이 달리면서도 항상 하퍼보다 두서너 발 정도를 앞서고 있었다. 반환점을 통과하는 순간, 드디어 그는 길동무 앞으로 대여섯 걸음 벗어나 피치를 올리기 시작했다. 마침내 그의 눈앞에 자바라가 나타났다. 25km 지점이었다.
  • 양정 고보 시절, 그리고 사람들 사람들…
    주로 늘 불그레하시던 아버지…
    입을 것, 신을 것을 꺼내주시던 어머니…
    친동생처럼 보살펴준 김봉수 선배, 이병옥 선배…
    늘 따뜻함으로 격려해주신 마음의 힘, 김수기 선생님…
    마라톤 선수에 대한 꿈을 심어준 권태하 선배…
    뒤따라오고 있는 남승룡 선배…

아! 남승룡은 어찌 되었을까?

이 때 중위권에 쳐져 있던 남승룡은 여러 선수를 차례로 따돌리고 역주에 역주를 거듭하여 8위로 진입했다.

오르막길이 최대 고비였다. 마지막 고통이 온 몸을 통해 얼굴 끝까지 치밀어 올랐고 안구가 터질 듯 했다. 발이 부어 올라 통증이 심했고 하지만, 강렬한 태양빛으로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오기 시작 했다. 그렇게… 6분 동안 달렸다. 드디어 오르막 정상에 올라섰다.

드디어 40km 지점을 통과해 메인스타디움이 가까워졌을 때 적십자사에서 나온 중년의 루이제 네프 부인이 물 컵을 들고 있다, 달려오는 손기정 선수를 향해 물을 권했다. 그는 달리면서 물 컵을 받았지만 마시지는 않았다. 레이스 도중에 물을 마시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기에, 대신 물로 입을 행구고, 목과 얼굴을 문질렀다, 한결 시원해지면서 힘이 솟았다.

이제 42.195km 중에서 단지 2.195km가 남았다. 선두에 서는 마라토너라면 누구나 마찬가지지만 남아있는 거리가 많지 않다는 생각이 들면 우승에 대한 확신과 안도감으로 더욱 힘이 솟는 법이다. 손기정 선수는 우승의 확률이 높은 35km 지점을 넘어 40km를 지나자 우승에 대해 거의 확신했다. 드디어 메인스타디움이 눈 앞에 나타났다. 자바라가 우승에 대한 욕심으로 힘차게 달려 나왔던 출발 지점이 이제는 종점이 되어 그를 향해 활짝 열려 있었다. 그가 문 안으로 힘차게 들어서자, 탑 위의 나팔수들이 그의 입장을 알리는 나팔을 불었다.
  • 베를린올림픽 결승선 통과 사진

  • 2시간 29분 19초 2!

    우승자를 기다리던 8, 9만의 관중들이 열광적인 환호성을 터트렸다.
    관중들은 이미 장내 아나운서를 통해 손기정 선수가 1위로 들어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순간, 심장박동의 고통도 발의 통증도 잊혀졌다.

    그는 기립박수와 환호 속에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결승 테이프를 향해 반 바퀴를 전력 질주하기 시작했다. 관중석을 향해 승리를 만끽하는 여유를 부리는 대신 단거리 주자처럼 전력 질주를 하기 시작했다. 드디어 맹수가 달려들 듯 테이프를 끊은 그의 왼손에 결승 테이프가 잡혔다.

    2시간 29분 19초 2!
42.195km가 끝났다. 악몽 같은 42.195km가 끝났다. 올림픽뿐만 아니라 국제공식대회에서 마의 30분벽을 깨트린 의미 있는 대기록이었다. 단거리 주자처럼 결승점으로 달려간 손기정 선수는 테이프를 끊고도 이내 걸음을 멈출 수 없었다. 대회 관계자들이 담요를 든 채 그를 따라갔다. 드디어 트랙 모퉁이에 주저앉은 손기정 선수의 어깨 위로 담요가 걸쳐졌다.
‘아! 정말 끝났는가?’ 그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레이스 내내 그를 괴롭혔던 러닝슈즈의 끈을 풀어 벗어 신발을 들고 일어섰다. 하지만 영광의 주인공은 관중석을 쳐다보기는커녕 고개를 수그린 채 묵묵히 탈의실로 향했다. 관중들은 우승의 기쁨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는 우승자의 표정에 의아해 했다. 대부분의 승자들과 달리 그의 얼굴에는 환희가 아닌 침울함만이 어려, 빈손으로 돌아온 사람처럼 허탈한 모습으로 탈의실로 걸어갈 뿐이었다. 그로부터 2분이 넘어서야 영국의 하퍼가 2시간 31분 23초의 기록으로 결승점을 통과했다. 그 뒤로 남승룡이 2시간 31분 42초로 들어오면서 3위를 기록했다.

손기정 선수의 우승 소식에 일본의 요미우리신문 등 매스컴들은 잇따라 국제전화를 걸어 그에게 우승소감을 물었다. “우승 후의 소감은?”이라는 질문에 그저 “이렇다 할 느낌은 따로 없다. 감격했을 뿐이다.” “하퍼가 레이스 도중 무엇인가 충고를 해주었다는데……?” 라는 질문도 받았다. “지나치게 스피드를 내지 말라는 충고를 받았다. 스포츠맨십을 지닌 훌륭한 선수다. 우승은 그의 친절한 충고덕분이라고 생각한다.” 라고 짧게 답했을 뿐이었다. 일본의 매스컴뿐만 아니라 조선일보로부터도 베를린의 손기정 선수에게 국제 전화가 걸려왔다.
“손기정 선수 우승 축하합니다. 조선일보의 도쿄지국입니다. 우승의 소감을 들려주십쇼.” 조선일보로부터 걸려온 국제전화를 통해 동포의 목소리를 들은 손기정은 목이 메었다. 수화기를 쥐고 손기정은 목을 놓아 울어 버리고 말았다. 조선일보 도쿄지국의 기자는 수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손기정의 통곡소리를 듣고 그동안 손기정, 그리고 우리 민족이 걸어왔던 형극의 길을 돌이키면서 감정이 복받쳐 역시 목이 메고 만다.

우리 민족, 겨레의 우승

일본과 독일 사이에는 시차가 있기 때문에 손기정 선수와 남승룡 선수의 우승의 쾌거 첫 소식이 도쿄와 서울에 전해진 것은 다음날 새벽 1시 35분이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일본과 한반도는 온통 기쁨의 도가니로 변했다. 한 편 한반도에서의 열광은 일본에서의 흥분과는 내용의 본질이 달랐다. 손기정의 우승은 우리 겨레가 지니고 있는 힘의 확인이었다. 사람들은 기쁨을 억누르지 못해 집에서 튀어나와 거리를 달렸다. 서울 중심부인 광화문에 자리 잡은 동아, 조선, 조선 중앙 등 각 신문사 앞에 마련된 속보판에는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몰려들었다. 손기정의 올림픽 마라톤 제패가 가져온 열광은 서울뿐만 아니라 한반도 곳곳을 뜨겁게 달구었다. 뒷날 손기정의 메이지 대학 후배가 되고 자유당 말기 대한 체육회의 회장 서리(직무대리)를 지낸 신도환(辛道煥)은 “손기정 선배가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의 우승을 차지했을 때 나는 계성 중학 1년생이었다. 대구도 기쁨의 눈물바다가 됐다. 손기정 선배의 우승은 우리 민족이 지닌 무한한 가능성을 스포츠를 통해 나타낸 것이라는 점에서 뜻이 깊었다. 당시 우리 겨레가 놓여있던 어려운 시대적 상황 탓도 있었겠지만 아마 앞으로도 손기정만치 우리 민족을 감동시키는 올림픽 메달리스트는 나오지 않을 것이다.” 라고 돌이켰다.

1932년 「상록수」를 동아일보에 발표했던 작가 심훈(沈薰)은 「오오 조선의 남아여!」라는 시를 지어 기쁨을 나타냈다.
이 시는 심훈의 생애 마지막 작품이기도하다. 그는 이 시를 지었다는 이유로 일본 경찰에 불려가는 수모를 겪는다.
  • 작가 심훈(沈薰)의 「오오 조선의 남아여!」가 실린 1932년 동아일보 신문
  • <오오 조선의 남아여 신문기사>

    오오 조선의 남아(男兒)여 백림(伯林) 마라톤에서 우승한 손기정,
    남승룡 군에게- 심 훈(沈 薰)

    그대들의 첩보(捷報)를 전하는 호외(號外) 뒷등에 붓을 달리는 이 손은 형용(形容) 못할 감격(撼動)에 떨린다. 이역(異域)의 하늘 아래서 그대들의 심장(心腸) 속에 용솟음치던 피가 2천3백만(三千三白萬)의 한 사람인 내 혈관(血管) 속을 달리기 때문이다.

    “이겼다.”는 소리를 들어보지 못한 우리의 고막(鼓膜)은 깊은 밤 전승(戰勝)의 방울 소리에 터질 듯 찢어질 듯 침울한 어둠 속에 짓눌렸던 고토(故土)의 하늘도 올림픽 거화(炬火)를 켜 든 것처럼 화다닥 밝으려 하는구나!

    오늘 밤 그대들은 꿈 속에서 조국(祖國)의 전승(戰勝)을 전하고자 마라톤 험險한 길을 달리다가 절명(絶命)한 아테네의 병사(兵事)를 만나보리라.
    그보다도 더 용감했던 선조(先朝)들의 정령(精靈)이 가호하였음에 두 용사(勇士) 서로 껴안고 느껴 느껴 울었으리라.

    오오, 나는 외치고 싶다! 마이크를 쥐고 전 세계(全 世界)의 인류를 향해서 외치고 싶다! “인제도 인제도 너희들은 우리를 약한 족속(族屬)이라고 부를 터이냐!”

  • 아사히신문_일장기말소사건 관련

  • 손기정, 남승룡 선수의 우승 소식을 국내 신문사들도 앞 다퉈 내보냈다. 이들은 우리 민족의 우승임을 강조하기 위해 일장기를 지워 발행했는데, 이 방법도 신문사마다 그 방법을 달리 하였다. 가장 잘 알려진 동아일보의 일장기 말소사건의 경우, 손기정 선수의 시상식 당시 사진에서 일장기를 지우고 사진을 전체적으로 흐릿하게 하여 발행하였다. 이는 8월 25일 오후 4시 가까이 서울 용산에 주둔해 있던 일본군에 의해 발각되어 사건직후 동대문서와 종로서의 유치장은 동아일보 사원으로 가득 찼다. 이들 연행자 가운데, 일장기 말소 사건의 주요 용의자로 뽑힌 것은 사진 수정을 가장 먼저 생각해내고 제안한 이길용(李吉用) 체육주임기자, 사회부장 현진건(玄鎭健), 잡지부장 최승만(崔承萬), 사진과장 신낙균(申樂均), 사진제판기술자 서영호(徐永浩)의 다섯 사람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피투성이가 되어 석방되었지만 이들 다섯 명은 40일 동안 풀리지 않은 채 엄한 고문을 받아야 했다. 고문의 주된 목적은 일장기 말소가 동아일보 창설자 김성수(광복 후의 부통령), 사장 송진우(광복 후의 한국민주당 당수)의 직접 지시에 의해 이루어진 것임을 자수 받아 이 사건을 계기로 동아일보를 아예 없애버리고자 한 것이다.

    8월 13일에 독립운동가 여운형이 사장을 맡았던 조선중앙일보는 일장기를 지운 사진을 신문에 실었었다. 그러나 동아일보 사원들 체포 소식을 듣고 일제의 탄압을 피하고자 미리 선수 쳐, “사원의 잘못으로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가 뚜렷하지 않은 점을 반성하고 자진해서 휴간한다.”는 사고(社告)를 냈다. 그러나 이 일이 있은 뒤 경영난에 빠져 재기를 못하고 조선총독부로부터 발행권을 취소당해 버린다.

    동아일보의 자매지인 월간여성지 「신가정」(新家庭)은 일장기를 싣기 싫어 손기정의 다리 부분만을 사진으로 싣고 「이것이 베를린 우승자, 위대한 우리들의 아들 손기정의 다리」라는 사진 설명을 달았다. 「신가정」의 주간인 변영로(卞榮魯)에게도 종로서로부터 두 사람의 형사가 찾아왔다. 그들은 변영로에게 어째서 손기정의 다리만 실었느냐, 일장기를 내기 싫어서 그런 것 아니냐고 힐문했고, 언변이 뛰어난 변영로는 이에 맞서 “손기정 선수가 무엇으로 세계를 제패했다고 생각하는가. 그가 세계를 제패한 것은 무쇠같은 다리를 가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다리만 실은 것이다.” 라고 말하며 당당히 일본 경찰에 맞섰다. 그러나 이에 지지 않고 일본 경찰은 휴지통을 뒤져 다리 위 상반신을 찾으려 했고, 동아일보사의 쓰레기통 및 사옥 남쪽의 쓰레기 더미를 몽땅 뒤져냈다. 그러나 다행히 찾아낸 사진은 다리부분만 잘라낸 양정고보 시절 「養(양)」자가 달린 유니폼을 입은 사진이어서 변영로는 위험한 순간을 모면할 수 있었다.

「기미가요」와 태극기

시상대에서 손기정 선수의 귀 속을 파고들던 「기미가요」에 대한 일화가 있다. 당시 「기미가요」를 연주한 합창 단원 중에는 두 사람의 조선인이 있었다.
그들은 베를린 대학에 유학 중이던 양정 선배인 안병소(安柄玿)와 이애네(李愛內)였다. 훗날 그들은 손기정 선수를 만났을 때 “당신을 위한 승리의 축가여서 더 정성을 들여 노래했소, 노래는 비록 「기미가요」였지만 노래를 부른 뜻은 당신에 대한 축하의 표시오. 우리가 그 외에 무슨 노래를 부를 수 있었겠소?” 라며 당시의 가슴 아팠던 심경을 토로했다.

시상식이 끝나고 마라톤 우승과 차기 올림픽 동경 개최를 축하하기 위해 일본 선수단 본부는 축하파티를 열고자 준비를 갖추었으나 그 파티의 주인공인 손기정 선수와 남승룡 선수의 모습을 찾지 못해 당황했다. 일본 선수단 본부가 손기정 선수와 남승룡 선수를 찾고 있던 시간에 두 사람은 정상희, 권태하 선배의 안내로 선수촌을 빠져나가 베를린에 살고 있는 안봉근의 집에 있었다.
안봉근은 안중근 의사의 사촌 동생이다.
안봉근의 서재에 들어선 손기정과 남승룡은 태극기를 난생 처음 보게 된다. 자서전에서 손기정 선수는 「……‘이것이 태극기다. 우리 조국의 국기다.’ 그렇게 생각이 들자 감전이 된 듯 뜨거운 감격이 몸에 흘렀다. 탄압과 감시의 눈을 피해 태극기가 이렇게 숨 쉬고 있듯이 우리 민족도 살아있다는 확신이 우러났다.」 라며 망국의 현실 속에 뜨거운 민족애를 느꼈다. 후에 일본 선수단 본부임원들은 그들이 준비한 축하파티에 무단으로 참석하지 않은 손기정, 남승룡 선수가 선수촌을 빠져나가 동포들의 환영 모임에 갔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노발대발했다. 그리고 조선인 선수들에 대한 일제의 냉대는 더욱 심해졌다.

불발된 환영회

손기정, 남승룡 선수는 우승 후 일본 동경으로 귀국하지만 일본 경찰의 감시 아래 제대론 된 환영회를 열지 못하게 된다. 손기정, 남승룡 선수의 우승으로 우리 민족의 독립의 의지가 고양되어 집단 행동으로 이어질 것을 염려하여 애초에 차단한 것이다. 당시 일본 특별고등경찰 기관지인 특고월보(特高月報) 1936년 10월호에는 이 같은 사실이
다음과 같이 객관적 자료로도 드러나 있다. “독일 체류 중 외국인의 사인 요청에 `KOREA(고려) 손기정’이라고 쓰는 등 불온한 행동을 했다” “조선기독교청년회와 조선유학생동창회, 신문사 관계자 등 도쿄에 있는 민족주의계 조선인들은 (손기정ㆍ남승용 선수에 대한) 대대적 환영회 개최를 도모했고 도쿄 내 각 대학 조선인 유학생들의 추계 육상운동회를 두 선수의 환영운동회로 만들고자 여러 가지를 획책했다” “민족주의 운동은 두 선수 귀국을 계기로 상당히 고조된 형세”라며 “이때 조선인만의 환영회와 위안회 등의 개최를 허가한다면 민족적 감정이 높아져 일본인과 조선인간 대립 기운을 키울 수 있다”
또한 손기정ㆍ남승룡 선수가 도쿄로 돌아왔을 때 선수 대열의 맨 끝에 선일을 두고는 “일반 조선인의 접근이 쉽도록 한 듯해 일반 민족주의자의 뜻에 부합하려 한 것으로 인정되는 행동”이라 기록했다. “경시청에서는 조선인만의 환영회 등은 일절 허가하지 않는 방침을 택했다” “도쿄 체류 조선인의 환영행사 계획은 중지시키고 각 대학 조선인 유학생의 육상운동회도 환영 분위기가 진정되고 나서 개최하도록 설득하는 등 엄중 단속해 불온 책동(策動)을 대부분 저지했다” 이를 통해 당시 손기정, 남승룡 선수의 베를린 마라톤 우승이 우리 민족의 독립 의지 고취에 크나큰 영향을 주었다는 것과, 일제가 이를 두고 크게 염려하여 민족 단결을 방해했음을 알 수 있다.